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독일 공군(나치 독일) (문단 편집) ==== 운용 ==== 역사상 가장 많은 항공기를 격추시킨 군대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다. 독일 공군의 총 격추수는 약 67,700대로 집계되며 이중 46,000대가 소련 공군을 상대로 거둔 전과다. 반대로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많이 격추당했을 가능성도 있다. 2차 대전 중 독일 공군은 약 43,000 ~ 49,000대의 항공기를 전투손실했는데 독일 공군의 격추셔틀인 소련 공군이 2차 대전 중 격추된 항공기가 45,000대라 더 적을 가능성도 있다. 다만 소련 공군의 전투손실대비 비전투손실이 너무 높아서 전투손실의 일부가 비전투손실로 처리된 게 아니냐는 의혹이 있어 실제로는 소련 공군이 더 많을 가능성이 높다. [[프랑스 침공]] 당시 지헬슈니트 작전에서 연합군은 전쟁이 장기전으로 갈 것이라 생각하여 공군력의 일부만을 전선에 배치해두었지만 독일군은 공격 하나에 자신의 국가가 사라질지도 모르는 위기였고 만일 실패했다간 거의 모든 기갑 부대를 소모하고 역공격 기회를 주었을 것이므로 '''가용 공군력의 대부분을 배치'''했다. 이는 연합군 공군에게 마치 독일군이 압도적인 공군력을 가진 것처럼 보이는 착시현상을 느끼도록 할 수 있었다. 독일 공군은 전 공군력의 2/3인 2,589대를 투입한 반면, 프랑스군은 1/3 수준인 879대만 투입했다. 물론 영국과 프랑스는 넓은 식민지를 가지고 있었고 따라서 본토 밖에 전개된 기체가 많았다는 반론은 가능하나, 이런 식으로 본토 밖의 기체는 제외하고서라도 나머지 1,528대의 전투기와 690대의 폭격기는 후방에 배치되어 있었다.[* 출처 [[전격전의 전설]] p-96] 여기에 [[스페인 내전]]에서 얻었던 경험들도 한몫했다. 스페인 내전 당시 소련, 독일, 이탈리아를 제외한 강대국들은 의용군을 조금 보내거나 소련의 해양 수송을 조금 눈감아주는 등의 지원밖에 하지 않았지만 독일과 이탈리아는 달랐다. 이들은 그야말로 전폭적인 지원을 하여 스페인 내전을 신기술과 전술의 시험장으로 만들어버렸고 독일의 콘돌 군단이 내전종료 후 귀국할 때 들고온 엄청난 양의 실전 데이터는 독일 공군에게 전술 교정의 기회를 주어 양/질적 수준에서 열세라도 전술의 우세함으로 이길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을 갖게 해준 것이다. 특히, 이 중 가장 큰 수익은 바로 '''모든 전투기에 무전기를 설치하여 편대간의 대화를 원할히 하는 것이 매우 효율적인 공중전을 가능하게 한다'''[* 반대로, 지구 반대편의 동맹국 일본(특히 일본 해군 항공대)은 끝까지 이걸 안 해서 망했다. 일부 기체에 무전기가 설치되기는 했으나 장식 수준이어서 대다수의 경우에는 제거하고 운용되었고, 정비 병력들의 무전기 관련 이해도도 높지 않았다. 이러한 무전기의 부재는 그나마 태평양 전쟁 초반에는 무전을 하지 않아도 알아서 감으로 공중전을 수행하는 베테랑 조종사들의 존재 덕에 어느 정도 상쇄되었으나, 대전이 계속되면서 이러한 베테랑 조종사들이 대부분 사망하면서 무전기의 부재는 일본군 조종사들에게 매우 큰 손실을 강요했다.] 는 것을 독일 공군에게 깨닫게 해주었다는 점이다. 공중전에서는 (똑같은 훈련 시간을 가졌다고 가정한) 공중전을 한 번 경험한 전투기 조종사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전투기 조종사간의 실제 실력차가 엄청나다는 것을 보면 분명 스페인 내전에서의 귀중한 실전 경험들이 독일 공군의 조종사들을 매우 강화시켜줬다는 것은 절대 부정할 수 없다. 반면 소련은 내전 당시부터 공화파의 금고 보유량을 비롯한 받을건 다 받아 갔으면서도 막상 지원은 생색내며 도와줬으며, 그나마 [[T-26]]이나 [[I-16]]등을 운용하면서 얻은 전차전이나 항공전 경험은 단점을 교정하기보다는 잘한 점만을 부풀리는 식으로 이용해 전력을 강화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날렸다. 물론 이후 벌어진 이오시프 스탈린의 대숙청도 한 몫 했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 공군 조종사의 훈련 시간은 루프트바페의 규모를 아득히 뛰어넘는 방대한 전선에 병력들은 우겨넣으면서 점점 짧아졌는데 미군 육군 항공대 조종사는 적절한 경험을 쌓은 에이스들이 배출되는 동시 이 에이스들을 계속 전선에 투입하는게 아니라 후방으로 돌려서 에이스들의 노하우를 전수하도록 하는 등 조종사 훈련이 잘 이루어졌다. 대전 후반이 될수록 연합군의 물량 공세(물량이라고 하지만 에이스들을 제외한 일반 파일럿, 특히 신참 조종사의 평균 실력은 미군 조종사가 압도하는 상황이 되어갔다. 질적으로도 우수해졌는데 양까지 압도하는 상황이니 버틸 수가 없다.)에 100기 격추수가 넘는 슈퍼 에이스들은 점차 하나둘씩 전사하고 신참 조종사만이 남아서, 상대하는 미국 육군 항공대에선 1일 에이스도 여럿 나올 정도로 굴욕을 당해야 했다. 2년 전만 해도 유럽 동부 전선에서 처참한 수준의 소련군을 상대로 학살을 하며 1일 에이스를 양산하던 독일 공군의 몰락이라 참으로 비참한 지경, 이젠 본토로 밀고들어오는 연합군의 4발 중폭격기와 호위기들을 상대해야했으며, 1944년 초 연합군과의 [[대주간]]에서도 피해를 입었다. 이후 아르덴 대공세 당시 프랑스 침공 때와 마찬가지로 가용 공군력을 투자한 [[보덴플라테 공세]]를 감행했다가 괴멸당했고 이후 로켓 전투기 [[Me 163]], 제트 전투기 [[Me262]] 등을 비롯한 신무기에 목을 맬 수밖에 없는 상황에 허덕이다 종전에 이르게 된다. 한편 공군의 지상 지원 임무라는 측면에서는 여타 연합군에 비해 비교적 훌륭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전쟁 내내 Ju 87, 일명 "[[슈투카]]"로 대표되는 루프트바페의 지상 지원 임무는 전투 곳곳에서 엄청난 충격을 주며 독일 육군의 기갑 부대가 진격하기 용이하게 해주었다. 흥미로운 점은 그 당시 참전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슈투카의 물리적인 피해는 예상외로 적었다고 한다.[* 이는 [[오토 카리우스]]의 자서전에서도 언급되는 내용이다. 다만 오토 카리우스가 슈투카의 전과를 서술한 부분은 1943년 말에서 1944년인 대전 후기이기에, 전체적으로 독일 공군 조종사들의 기량이 하락하였다는 점은 감안하고 보아야 한다.][* 사실 생각해 보면 이는 당연한 것이다. 슈투카는 어디까지나 단발 엔진 급강하폭격기였기에 폭장량이 많아야 1톤 500kg(D-3 기준) 정도였고, 당연히 대전 말 미군이나 영국군의 2발/4발 중폭격기처럼 높은 폭장량을 앞세워서 폭격으로만 엄청난 피해를 입히는 것은 불가능했다. 게다가 급강하폭격의 명중률이 수평 폭격에 비해 높았다고는 하지만 백발 백중은 아니었을 테니 실질적인 피해는 생각보다는 꽤 적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슈투카의 물리적인 피해가 크지 않음에도 엄청난 전과를 세울 수 있었던 데에는 심리적인 효과가 컸다. 슈투카는 [[제리코의 나팔|낙하시 특유의 굉음]]을 냈는데 이 소리만 들어도 보병 부대가 전의를 상실했다고 한다. 전쟁 초중반에는 이 점을 극대화하기 위하여 공압 사이렌[* 나팔 2개를 이어놓은 것처럼 생긴 사이렌인데 전방에서 들어오는 공기를 압축하여 후방으로 뿜을때 소리가 나도록 만든 사이렌이다.]을 일부러 달아서 더더욱 악랄하게 연합군을 괴롭혔다. 그러나 대전 후반기에 가선 연합군이 사이렌 소리에 익숙해져 되려 셀프 공습경보로 전락해버린 관계로 D형부터는 제거해 버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